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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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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18 18:40 조회17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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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편집]
어린 시절[편집]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1545년 음력 3월 8일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주었고, 셋째 아들이었던 그에게는 순신(舜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5]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류성룡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무과 급제[편집]
1565년 스무살이 되던해 충무공은 방씨(方氏)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였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訓錬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낙마하여 왼쪽 정강이가 부러지는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완수하였지만, 결국 낙방하였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6]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편집]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1587년(선조 20년)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무관 생활[편집]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 1591년 2월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 그는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7]

1591년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 이순신은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편집]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왜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5월 26일(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黄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9일(음력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옥포 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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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해전은 이순신이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반도의 대부분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사천 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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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노량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바로 사천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두번째 출동하여 벌어진 첫 번째 전투였고, 또한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다.

이순신 함대는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는데, 왜군이 보유하던 화포에 비하여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음력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일(음력 6월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 크기의 배 12척 작은 크기의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16일(음력 6월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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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왜나라의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 함대는 8월 10일(음력 7월 4일)에 출발하여 12일(음력 7월 6일)에 노량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 때 적선이 출몰하였다는 첩보를 얻어 14일(음력 7월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의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모든 군선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적함선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린 뒤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8월 15일(음력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6일(음력 7월 10일) 학익진을 펼친채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부산 해전[편집]
음력 8월 말 이순신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여 그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왜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네번의 전투를 거치는 중,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원균과의 불화[편집]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반듯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8]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러한 두 인물에 대한 입장차이가 심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 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산채로 매장한 최악의 제독으로 평가한다.

웅포 해전[편집]
이순신 함대는 1593년 2월 10일(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왜의 수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다. 조선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리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전라도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편집]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한편, 왜의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은 함락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두 번째 백의종군[편집]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9]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4월 11일(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4월 19일(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5월 26일(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은 4월 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편집]
 칠천량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건의[10] 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월 9일(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편집]
명량 대첩[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명량 해전입니다.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1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전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노량 해전입니다.

노량해전 지도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5천명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의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11]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왜란은 끝났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후 관직[편집]

황의돈의 <증정 중등조선역사> (1946·서울교육박물관 소장) 69쪽에 있는 이순신의 초상화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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